영화 · 기록

계시록

한줄평

믿음은 자신을 직시하지 못한 채 달아나려는 마음에서 비롯된다.

줄거리

신의 계시를 받았다 믿고 실종 사건의 범인을 단죄하려는 목사와 죽은 동생의 환영에 시달리면서도 끈질기게 범인을 쫓는 형사. 어두운 현실 속 각자의 믿음을 따르는 자들의 추악한 민낯이 드러난다.

소감

언제나 그런 것 같다. 사람은 너무 힘들어지면 무언가에 기대고 싶어지고, 위로받고 싶어지고, 끝내는 자신이 저지를 행동마저 용서받고 싶어진다. 핵심은, 그 행동이 스스로도 용서할 수 없는 것임을 이미 알고 있다는 데 있다. 그래서 힘들어질수록 우리는 나보다 높은 존재에게 용서를 구하려 한다.

계시록 역시 그런 것이 아닐까. 나보다 높은 존재 앞에서 자신의 용서를 정당화하고, '어쩔 수 없었다'는 이유를 덧붙이는 일. 친구 A, B, C가 있다고 해보자. B가 A를 때렸다면 B는 한없이 나빠 보인다. 그런데 'C가 시켜서 어쩔 수 없이 때린 것'이라고 하면, 그 순간 정당성이 생겨난다. 그리고 그 말은 곧 'C는 세상을 지키기 위해 B를 내세워, 천하의 죄인인 A를 정의의 이름으로 처단한 것'으로 부풀어 오른다. 이렇게 핑계에는 살이 붙는다.

살은 붙을수록 구체적이 되고, 마침내 나조차 알지 못하던 이야기까지 입에 담게 되면, 그것은 더 이상 살이 아니라 뼈가 된다. 문제는, 그 뼈를 외워 정당화하려는 순간 뼈가 제 소리를 내며 울려 버린다는 데 있다. 살이 뼈가 되고 말이 씨가 될 무렵이면, C가 했다는 말도, B가 때린 일도, A가 맞은 일도 — 모든 것이 의미를 잃는다. 우리는 늘 이런 말들에 너무 많은 씨를 심어 두는 것이 아닐까.

사람이 가장 힘들 때 보고 싶은 것만 본다는 사실도 마찬가지다. 괴로운 일을 겪고 나면 허공도, 구름도, 스쳐 가는 버스의 번호마저도 어떻게든 자신과 엮어 '이건 운명이야'라고 중얼거린다. 다 부질없는 줄 알면서도, 끝내 부정하지 못한 채로.

영화 속에서 계시를 건넨 것이 악마였든, 신이었든, 인간의 본성이었든 — 사실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죄책감도, 두려움도, 무서움도 결국 벽에 핀 곰팡이 같은 것이니까. 내가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그것은 신이 되기도, 악마가 되기도, 때로는 나 자신이 되기도 한다. 모든 것은 결국 내가 생각하기 나름이다.

다만 영화에서 가장 안타까웠던 장면 — 강간당한 여동생을 지키지 못한 누나가 끝내 악몽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그 대목에 크게 공감하지 못한 것은, 두고두고 아쉬움으로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