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 기록

구의 증명

천 년 후에도 사람이 존재할까

― 『구의 증명』을 읽고


천 년 후에도 사람이 존재할까. 누군가 이 글을 읽는다면, 그때가 천 년 후라면 좋겠다.

『구의 증명』의 첫 문장이다. 존재가 얼마나 오래 남을 수 있는가. 존재라는 것의 의미는 무엇일까. 과연 나는 죽음을 성숙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일까. 만약 죽음을 의연히 받아들이는 것이 성숙함이라면, 나는 끝내 그 자리에 도달하지 못할 것 같다.

누구가를 두고 떠나본 경험이 있는가. 그리고 남겨진 사람의 슬픔이 떠나는 사람의 고통보다 깊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면. 사랑하는 이의 죽음이란, 육체의 소멸보다도 정신의 부재가 더 오래 남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래서일까. 너와 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나는 너를 남기고 떠나겠다고 생각했다. 윤지영의 노래 〈언젠가 너와 나〉처럼 사랑은 때로 남는 쪽보다 떠나는 쪽이 감당해야 할 몫이기도한 것 같다.


나는 아직 실질적인 죽음을 경험한 적도, 그 죽음을 정면으로 마주한 적도 없다. 그러나 죽음이란 결국 홀로 남겨지는 감각이라면, 차라리 떠나는 쪽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구의 죽음은 정말 육체적인 죽음이었을까. 다시는 볼 수 없다는 사실, 되돌릴 수 없다는 인식은 살아 있는 사람에게 더 잔혹한 고통과 감당할 수 없는 행위를 주기도한다. 그래서 '무'라는 단어는 어울리지 않는다. 없었던 일이라고 하기엔 너무 선명하고, 있었던 일이라고 하기엔 이미 과거가 되어버렸다. 되돌릴 수 없지만 존재했다는 사실만은 여전히 참이다.

구의 죽음은 정말 육체적인 죽음이었을까? 다시는 볼 수 없다는 사실, 되돌릴 수 없는 것. 그것의 '무'라는 단어에 어울릴까? 없었던 일이라고 하기엔 너무 선명하고, 있었던 일이라고 하기엔 이미 과거가 되어버렸지만 되돌릴 수 없지만 존재했다는 사실을 증명할 방법은 담이에게는 먹는 것 밖에 없었다. 구와 하나가 될 수 있다는 명제는 참이고, 함께 있다는 말 또한 참이며, 구를 먹은 담이가 존재했다는 사실 역시 참이기 때문이다. 논리적으로도 감정적으로도 담이에게 다른 선택지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구의 죽음은 담이의 모습이여야했다. 구는 죽는 순간까지 담이를 생각했고, 담이는 살아서 그 죽음을 감당해야 했다. 떠난 구 역시 힘들었지만 이별을 감당해야하는 담이는 또한 감당해야한다.


연인과의 마지막 순간, 어떤 태도를 가져야 우리는 이상적인 사람이 될까. 이미 끝난 관계라며 담담해야 할까, 고통을 준 사람을 미워해야 할까, 아니면 그 순간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웃어야 할까. 나는 아직 그 답을 모른다. 다만 그때 너는 무슨 생각을 했고, 왜 그런 말을 했는지 끝내 묻지 못한 채 남겨두었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사랑이란 무엇일까. 추상적이면서도 지나치게 직설적인 단어이다. 『구의 증명』 속의 사랑은 하나인 것 같다.

구는 다른 여자와 육체적인 관계를 맺었고, 담이와의 연락이 끊겼다. 그럼에도 담이는 흔들리지 않았다. 이것을 믿음이라고 부르기에는 부족하다. 믿음이라는 단어는 논리적으로 설명은 되지 않지만 그러할 것이라고 확신하는 것인데 서로의 대한 확신이 사랑을 표현하는 것일까? 그보다는 오히려 구와 담이를 '둘'이 아니라 '하나'였다고 보는 편이 더 정확하다. 구와 담이는 서로를 믿고 서로의 부족한 점을 보와하는 관계가 아니라 서로를 '나'로 받아들였기에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종종 상대를 사랑하는 나 자신을 사랑한다고 착각한다. 그러나 소설 속의 사랑은 상대를 '나'로 보았을 때의 감정이다.

세상은 언제나 공평하지 않다. 구는 아버지의 빚이라는 구조 속에서 살아갔고, 담이는 돈을 전쟁이나 전염병에 비유한다. 개인이 원하지 않았더라도 누군가의 이익과 손해에서 시작된 환경은 쉽게 벗어날 수 없다. 구가 할 수 있었던 최선은 불행을 받아들이며 행복을 외면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담이는 늘 함께하고 싶었지만, 구는 이 문제를 끝내 혼자서만 견뎠다. 그 누구보다 곁에 있고 싶었던 사람은 싸늘해진 몸으로 담이를 떠올리며 죽어갔고, 담이는 살아남았다.


담이는 구를 먹음으로써 구와 함께 있음을 증명했고, 구와 하나가 되었음을 증명했다. 그리고 구는 말한다.

언젠가 네가 죽는다면 그때가 천 년 후라면 좋겠다. 나는 이미 죽었으니까 천만 년도 기다릴 수 있으니까.

마지막으로 죽음이란 무엇일까. 어릴 적, 내가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진다는 생각이 견딜 수 없이 무서웠다. 기억도, 생각도, 감정도 전부 부정당하는 상태가 죽음이라고 믿었다.

지금은 조금 다르다. 이제는 죽으면 나를 기억하는 사람의 기억 속에서 나는 살아 있다고 믿는 편이다. 언젠가는 잊히겠지만, 그때쯤이면 내가 사랑했던 것들 역시 사라져 있을 것이다. 그래서 괜찮다. 누군가가 죽어서도 나를 떠올려준다면 나는 이미 충분히 오래 살아 있는 것이고, 내가 사랑하는 것들 또한 내가 오래오래 기억할 것이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