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거리
어릴 적부터 자연과 동물을 사랑해 온 메이블은, 할머니와의 약속이 깃든 숲을 지키기 위해 동물들과 함께 시장 제리의 순환 고속도로 건설에 맞서게 됩니다.
소감
고통은 피부로 느끼는 것이 아니다. 과연 사람의 그릇된 욕망은 어디까지 갈 수 있냐를 보여준 만화인 것 같아. 내가 태어나서 본 만화중에 고어 소재를 적절하게 쓰고 이렇게 까지 고어한 만화를 본적이 없다. 사실 보고 좀 후회 좀 했다. 장면 하나하나가 너무 실사적으로 묘사되며 이렇게 까지 한다고? 라고 생각이 들정도로 스토리도 뛰어난 편이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한편한편 손떨어가며 봤던 것 같다. 물론 나도 고어를 잘 보지는 못해서 약간씩 가면서 눈을 살짝씩 감으면서 봤던 것 같다. 우선 일반적인 고어라고 하기에도 너무 잔인해서 좀 힘들긴하지만 나는 사람이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지 그리고 얼마나 솔직한 존재인지를 말하는 만화라고 생각한다.
청소년에게 부적절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만화에서 폭력은 피와 살점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 내면의 가장 추악한 층위를 드러내는 수단에 가깝다. 욕망, 결핍, 자기기만, 성애, 공허, 그리고 끝내 타인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어긋나버리는 비극적인 방식까지. 이 작품은 그것들을 가장 직접적이고 잔인한 형태로 끌어올린다. 그래서 이 작품은 단순히 피가 튀는 만화라기보다, 인간의 가장 추한 진실을 끝까지 파헤치는 만화라고 생각한다.
이 작품을 이야기할 때 우선 알아야 할 것은, 겉으로 드러나는 잔혹함보다 그 안에 깔린 인간 군상의 상태다. 이노우에, 류, 노보루는 서사의 중심이라기보다, 이 세계가 어떤 인간들로 이루어져 있는지를 보여주는 표본에 가깝다. 이노우에는 시체를 성적 대상으로 바라보는 헤로인 중독자이고, 류는 미유키를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결국 그녀를 이용하는 인간이다. 아주 약간의 인간미는 보일지 몰라도, 끝내 자기 욕망과 자기합리화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노보루 역시 인상적인 인물이라기보다, 이 세계의 비정함과 배신의 구조를 보여주는 한 조각처럼 기능한다. 이 인물들을 굳이 언급하는 이유는, 『고로시야 이치』의 서브 인물들조차 대체로 이런 결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 만화의 세계는 애초에 멀쩡한 인간들이 버티고 설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이노우에의 죽음부터가 그렇다. 그는 원래 안조파의 일원이었으나 도망쳐 얼굴까지 바꾸고 범죄에 가담한 인물이다. 하지만 약물 의존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결국 스스로 꼬리를 남기고, 처참한 죽음을 맞는다. 그 마지막 순간마저도 비틀린 성욕과 결핍으로 물들어 있다는 점은, 이 작품이 인간을 얼마나 바닥까지 끌고 내려가는지를 보여준다.
류 역시 비슷하다. 그는 미유키에게 자신을 중국에서 온 첩보원이라 속이고, 그녀와의 사랑을 지키겠다는 식으로 행동하지만, 결국 그 사랑조차 자기 서사의 일부로 소비하는 인물처럼 보인다. 미유키는 끝까지 버티지만, 류는 끝내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더 끔찍한 파멸 속으로 밀려 들어간다. 나는 이 장면이야말로 인간이 얼마나 쉽게 자기 비겁함과 욕망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합리화하는지 보여주는 극단이라고 느꼈다.
노보루는 상대적으로 비중이 희미하지만, 그 역시 잔인하게 소모된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 이 작품답다. 누군가의 삶과 죽음조차 특별한 의미 없이 폭력의 구조 속에 흡수되어 버리는 것, 그것이 이 만화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여기까지의 내용만 봐도 이미 버겁지만, 사실 『고로시야 이치』의 핵심은 이제부터다. 이 작품을 제대로 보려면 결국 이치를 봐야 한다.
이치는 어린 시절부터 지속적인 괴롭힘과 왜곡된 기억 속에서 살아온 인물이다. 그는 사람을 죽일 때조차 눈물을 흘리고, 말투 역시 어딘가 유아적이다. 겉으로만 보면 멍청하고 불안정한 인물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이치의 본질은 단순한 약함이 아니다. 그는 타인에게 고통을 가할 때 극도의 흥분을 느끼고, 폭력과 성적 충동이 하나로 엉켜 있는 존재다. 살인 이후 배설까지 이어지는 그의 반응은, 그가 이미 일반적인 인간의 감각 체계에서 한참 벗어나 있음을 보여준다. 그의 살해 방식마저도 비현실적으로 잔혹하다. 칼날이 달린 신발로 사람을 찢고 가르며 죽이는 방식은 단순히 강한 연출이 아니라, 이치라는 인물이 타인을 하나의 살아 있는 존재가 아니라 찢어낼 대상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상징처럼 느껴진다.
초반의 이치는 사실상 할아범에게 세뇌된 존재에 가깝다. 자신을 괴롭혔던 과거의 가해자와 닮았다는 말, 복수라는 명목, 그리고 왜곡된 기억의 덧칠 속에서 그는 살인을 반복한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안조파 두목을 죽이고 난 뒤부터, 이치는 비로소 자기 안을 들여다보기 시작한다. 그의 성장은 정상적인 의미의 성장이 아니라, 자신이 얼마나 비틀린 존재인지 알아가는 방향으로 진행된다.
세이라와의 관계는 그 점에서 중요하다. 세이라는 맞는 것을 부정하면서도 동시에 그 관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이치는 이상하게도 살인을 멈춘 채 그녀 앞에서는 다른 양상을 보인다. 마치 그녀가 자신의 왜곡된 충동을 다른 방식으로 봉합해 주는 존재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관계 역시 결코 구원이 아니다. 사랑인지 폭력인지, 구원인지 파괴인지 분간할 수 없는 채로 뒤엉키다가 끝내 죽음으로 귀결된다.
그리고 이후, 이치는 자신의 과거를 회상한다. 친구들에게 겁탈당하던 여자가 사실은 자신을 원했을 것이라 믿는 장면은, 얼핏 보면 그냥 완전히 미쳐버린 인간의 망상처럼 보인다. 하지만 내가 느낀 건 조금 다르다. 이치는 단순히 광기만으로 움직이는 인물이 아니라, 타인의 욕망과 감정을 끝까지 자기 식으로 번역해 버리는 인간이다. 그는 상대를 이해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견딜 수 있는 방식으로 상대를 해석한다. 그 해석은 결국 배려도, 사랑도, 연민도 아닌 자기기만이 된다.
전화방에서 다시 등장하는 그녀와의 대화는 그래서 더 중요하다. 그녀는 자신을 겁탈해 주지 않은 그를 원망하며, 자신에게 반쪽짜리 치욕만 남겼다고 말한다. 그리고 “강간당하길 원했기 때문에 당하고 싶지 않아 한 것”이라는 역설적인 말을 던진다. 이 말은 도덕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문장이지만, 적어도 이치의 세계 안에서는 아주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그는 그 순간 타인의 욕망을 자기 멋대로 이해해 온 방식이 얼마나 위험하고 왜곡된 것이었는지를, 혹은 역설적으로 더욱 굳게 확신하게 된다. 중요한 것은 진실이 무엇이냐보다, 이치가 그 말을 통해 자신의 세계를 완성해 버렸다는 점이다.
우리는 종종 자기 생각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계속 생각하고, 계속 해석하고, 끝내는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게 된다. 그리고 자기가 듣고 싶은 말만 진실이라고 믿게 된다. 겉으로 보면 그것은 이기심이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그 이기심이 상대를 배려하고 싶다는 왜곡된 욕망에서 시작되기도 한다. 『고로시야 이치』가 무서운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다. 가장 끔찍한 폭력조차 순수한 악의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 때로는 이해하고 싶다는 욕망, 사랑받고 싶다는 결핍, 상처받기 싫다는 비겁함이 뒤틀린 끝에서 폭력의 얼굴을 하고 나온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후의 이치는 더 이상 타인의 말을 듣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생각한 것이 곧 진실이라고 믿고, 자신의 방식대로만 움직인다. 그리고 그 확신은 점점 더 위험한 형태로 굳어진다. 이 시점부터 이치는 단순한 피해자도, 단순한 가해자도 아니다. 그는 자기만의 진실 속에서 움직이는 존재, 곧 욕망이 논리를 집어삼킨 인간의 완성형처럼 보인다.
카키하라는 그런 이치와 정반대의 방식으로 괴물성을 드러내는 인물이다. 그는 고통 그 자체를 즐기는 마조히스트이며, 잔혹함 속에서 오히려 쾌락과 생의 실감을 느낀다. 행동 하나하나가 엽기적이고 불쾌하지만, 동시에 기묘할 정도로 일관되어 있다. 그러나 그런 카키하라조차도 이치 앞에서는 압도당한다. 이치는 공포와 욕망, 폭력과 성애가 완전히 분리되지 않은 채 폭주하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카키하라가 고통을 즐기는 자라면, 이치는 욕망 그 자체가 파괴 충동으로 변한 자다. 결국 이 작품이 보여주는 가장 무서운 지점은 이것인지도 모른다. 즐기는 자 위에, 더 이상 설명이 통하지 않는 미친 존재가 있다는 것. 그리고 그 미친 존재는 사실 우리와 아주 멀리 떨어진 괴물이 아니라, 인간 욕망의 밑바닥을 끝까지 밀어붙였을 때 나타나는 하나의 형상일지도 모른다는 것.
번외로 호문쿨로스의 작가가 이치의 작가이기도 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