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으로
새벽의 상수역 앞에서는 무엇이든 쉽게 다가온다. 부르지 않아도, 손을 들지 않아도, 서 있다는 것만으로 무언가 곁에 와 선다. 그것이 빈 택시라는 걸 아는 데에는 잠깐이면 된다. 도시의 다른 곳에서는 한참을 기다려야 겨우 한 대가 오는데, 이 거리만은 그렇지 않다. 여기서는 기다림이 없다.
거리는 환하다. 새벽인데도 환하다. 지하에서 저음이 올라온다. 발바닥으로 먼저 느껴지고 그다음 귀에 닿는다. 문이 열리면 안에 있던 소리가 통째로 쏟아진다. 사람들이 그 문에서 나온다. 옷매무새가 풀린 채로. 신을 손에 들고. 누군가에게 기댄 채로. 화장이 번지고 넥타이가 늘어진 얼굴들이 도로변에 선다.
택시가 와서 선다. 문이 닫힌다. 그 순간 저음이 끊긴다. 방금까지 몸을 흔들던 소리가 한순간 사라지고, 사람들은 그제야 멈춘다. 자기가 어디에 있었는지 그제야 안다는 얼굴로. 들어갈 때는 줄을 서야 했던 곳에서, 나올 때는 손도 들지 않고 실려 나간다. 그렇게 빨리 들어가 빨리 나오는 동안 무언가를 쥐었다가, 문이 닫히는 순간 그게 손에 남아 있지 않다는 걸 안다.
나도 그 사람들 틈에서 차에 오른다. 미지근한 공기가 얼굴을 덮는다. 안과 밖은 온도가 다르고 소리가 다르다. 그 사이를 넘을 때 몸이 한 번 움찔한다. 기사가 백미러로 나를 본다.
"어디로 모실까요."
"서울숲이요."
기사는 짧게 고개를 끄덕이고 차를 출발시킨다. 미터기가 붉은 숫자를 켜고, 그 숫자가 한 칸 올라가는 작은 소리가 들린다. 차가 강변 쪽으로 머리를 돌리는 동안 나는 유리창에 머리를 기댄다. 창이 잘게 떨리고, 그 떨림이 관자놀이를 타고 들어온다. 눈은 감지 않는다. 감으면 오히려 더 환해진다. 그래서 뜬 눈으로 흐르는 바깥을 보면서, 그 위로 다른 풍경이 천천히 겹쳐 오는 걸 가만히 둔다. 그 정류장이 떠오른다.
거기엔 나무가 많았다.
키 큰 나무들이 가지를 뻗어 머리 위에서 서로 겹쳤고, 그 겹친 가지가 정류장 위에 천장을 만들었다. 누가 세운 게 아니라 자라난 천장이라 빈틈이 많았고, 그 틈으로 햇빛이 떨어졌다. 잎과 잎 사이에서 부서진 빛이 보도블록 위에 작은 조각으로 흩어졌다. 바람이 불어 잎이 뒤집히면 그 조각들이 한꺼번에 자리를 옮겼다. 그래서 그곳의 바닥은 가만히 있는 법이 없었다. 빛과 그늘이 끊임없이 자리를 바꾸며 사람들의 발등 위를 지나갔다. 푸르고 어지러운 곳이었다.
나는 그 숲에서 버스를 타지 않았다. 내가 오르는 곳은 그보다 몇 정거장 앞, 나무 한 그루 없는 평범한 정류장이었다. 버스가 출발해 한참을 달리다 그 푸른 정류장에 닿으면, 문이 열리고 그녀가 흔들리는 빛을 밟으며 올라왔다. 그 장면을 나는 늘 창 너머로 먼저 보았다. 그녀에게 그 숲은 매일 버스를 타는 자리였고, 나에게 그 숲은 매일 그녀가 나타나는 자리였다.
그 시각은 아침이라기엔 늦고 한낮이라기엔 일렀다. 도시의 첫 분주함이 한 차례 지나간 어중간한 때. 같은 시각, 같은 버스. 그 반복이 너무 당연해서 나는 그것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처음에 그녀는 그저 풍경이었다. 매일 같은 정류장에서 올라오는 사람. 누구인지 몰랐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같은 풍경 속에 같은 사람이 매일 놓여 있으면, 알려고 하지 않아도 알게 되는 게 생긴다. 그녀는 거의 창가에 앉았다. 가방을 무릎에 올려두었다. 버스가 흔들릴 때 손잡이 대신 앞좌석 등받이를 짚었다. 창밖을 볼 때 고개를 다 돌리지 않고 눈만 옆으로 두었다. 이런 걸 아는 데에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게 그녀를 안다는 뜻은 아니었다. 나는 그녀의 이름을 몰랐고,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몰랐고, 무엇을 하며 사는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몰랐다. 한 사람에 대해 이렇게 많은 걸 알면서 이렇게 아무것도 모를 수 있다는 게, 그때는 이상하지도 않았다.
우리가 처음 말을 섞은 건 한 물건 때문이었다. 그날 버스가 유난히 붐벼 나는 앉지 못하고 손잡이를 잡고 서 있었다. 과속방지턱을 크게 넘으면서 몸이 휘청했고, 그 바람에 가방 옆주머니에 걸어둔 키링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떨어지는 줄도 몰랐다. 마침 앞에 앉아 있던 그녀가 그걸 보고 주우려 몸을 숙였는데, 그 순간 버스가 다시 흔들렸고, 그녀의 발이 먼저 그 위를 디뎠다. 둔탁하게 눌리는 감각이 발바닥에 닿았는지 그녀가 흠칫 발을 들었다. 키링은 두 동강이 나 있었다.
그녀의 얼굴이 하얘졌다. 죄송해요, 하고 그것을 집어 들었다. 괜찮다고, 별것 아니라고 나는 말했다. 별것 아닌 척을 했다. 그런데 그녀가 부서진 키링을 손바닥에 올려놓고 들여다보더니 표정이 달라졌다. 이거, 하고 말끝을 흐렸다. 그녀는 그게 무엇인지 알아본 것이다. 어느 밴드의 굿즈였다. 한참 전에 아주 적은 수량만 만들어져 이제는 중고로도 거의 나오지 않는 것. 모르는 사람에게는 그냥 쇳조각이지만, 아는 사람에게는 돈을 줘도 구하기 어려운 물건이라는 걸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녀도 그 밴드를 좋아했던 것이다. 그 사실을 확인한 순간, 그녀의 목소리가 빨라지고 눈빛이 환해졌다. 미안하다던 얼굴은 어느새 사라지고, 그 밴드 이야기를 하는 다른 얼굴이 그 자리에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변상을 하겠다고 했다. 같은 걸 구해 오겠다고. 나는 그게 불가능하다는 걸 알았고, 그녀도 알았다. 구할 수 없는 걸 구해 오겠다는 말과 구할 수 없으니 괜찮다는 말이 우리 사이를 몇 번 오갔다.
버스에서 사람들이 하나둘 내려 자리가 비기 시작했다. 나도 손잡이를 놓고 어딘가 앉을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러자 그녀가 조용히 옆자리를 가리켰다. 거기 앉으라는 뜻이었다. 나는 그 옆에 앉았다. 그렇게 우리는 남은 길을 나란히 갔다. 결국 변상은 받지 않았다. 받을 방법이 없기도 했고, 받고 싶지도 않았다. 부서진 키링은 두 동강 난 채로 내 주머니에 남았다. 버릴 이유가 없어서 그냥 두었다.
택시 안 라디오에서 어떤 노래가 흘러나온다. 한참 유행하는, 어디서나 들리는 곡이다. 나도 모르게 미간이 좁혀졌던 모양이다. 백미러로 나를 한 번 본 기사가 말없이 라디오를 끈다. 언제부턴가 노래를 듣는 일이 불편해졌다. 차 안이 조용해지고, 그 조용함 속으로 다시 그날들이 들어온다.
우리가 다시 나란히 앉게 된 건 며칠 뒤였다. 그날 그녀가 먼저 나를 알아보고는, 이어폰 한 짝을 내 쪽으로 내밀었다. 그 밴드 신곡이 나왔다면서. 라디오에서는 좀처럼 틀어주지 않는, 아는 사람만 아는 밴드였다. 그 노래를 누구한테 들려주고 싶었는데 마침 잘됐다는 얼굴이었다. 나는 그 한 짝을 받아 귀에 꽂았다. 그렇게 우리는 맨 뒷자리에 나란히 앉았다. 기사의 백미러가 닿지 않는 자리. 거기 앉으면 버스 전체가 보이는데 정작 우리는 누구의 눈에도 잘 띄지 않았다.
그날 이후 우리는 종종 그 자리에 함께 앉았다. 한 사람의 귀에 한 짝씩, 같은 노래가 흘렀다. 선이 짧아 둘 사이의 거리가 한 뼘으로 고정되었다. 과속방지턱을 넘을 때마다 어깨가 부딪혔고, 커브를 돌면 둘 다 같은 쪽으로 쏠렸다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 한 뼘 안에서 우리는 어느 앨범이 더 좋은지, 어느 곡의 어느 부분이 좋은지 이야기했다. 의견이 갈리면 그녀는 즐거워했다. 가장 좋아한다는 곡이 나올 때는 오히려 말이 없어졌다.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지금은 거의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한쪽 귀로 노래가 흐르고 다른 쪽 귀로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던, 그 두 소리가 섞이던 감각은 남아 있다.
우리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버스를 타고 가는 동안 잠깐 나란히 앉는 사이. 연락처를 주고받지도 않았고 버스 밖에서 따로 만나지도 않았다. 다만 아침에 눈을 뜨면 그 버스 시간이 먼저 떠올랐고, 별다를 것 없는 하루에서 꽤 견딜 만한건 그 구간이었다. 늘 내가 먼저 내렸다. 빈 들판이 끝나고 회색 건물이 솟기 시작하는 자리에서, 이어폰 한 짝을 그녀에게 돌려주고 내렸다. 남은 노래는 그녀가 혼자 들었을 것이다. 그녀가 어디까지 가는지는 끝내 보지 못했다.
그 밴드를, 그중에서도 보컬을 나는 가장 좋아하게 됐다. 솔직히 처음부터 좋아했던 건 아니다. 그녀를 만나기 전까지 나는 그 밴드를 잘 알지도 못했다. 그런데 그녀 옆에서 그 목소리를 매일 듣다 보니, 어느새 그 사람이 제일 좋아졌다. 음악은 내가 그녀와 나눌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것이었고, 그 한가운데 그 사람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녀 옆에서 종종 그 사람 이야기를 했다. 목소리가 어떻고, 어느 무대에서 어땠고, 가사를 쓰는 방식이 어떻게 남다른지. 좋아하는 걸 좋아한다고 말할 때 사람은 좀 우쭐해지기 마련이라, 나는 그 사람을 칭찬하면서 은근히 내 안목까지 자랑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럴 때 그녀는 가만히 들었다. 맞장구를 치지도, 반박을 하지도 않고, 그저 창밖으로 눈을 두고 옅게 웃었다. 가끔은 그 웃음이 조금 쓸쓸해 보이기도 했다. 그 쓸쓸함이 무언가를 말하고 있다는 건 나도 어렴풋이 느꼈다. 다만 그게 무슨 뜻인지 캐묻지 않았다. 내 말에 동의하는 거라고, 아니면 별 관심이 없는 거라고 여기는 편이 나에겐 편했다. 그 웃음의 진짜 의미를 나는 한참 뒤에야 알았다.
그 무렵의 그녀는 어딘가 달라져 있었다. 가라앉은 얼굴 위로 내가 모르는 다른 빛이 비치는 것 같았다.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어볼 수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묻지 않았다. 우리는 그렇게까지 가까운 사이가 아니었고, 무엇보다 물어서 알게 될 답이 두려웠다.
그러다 어느 날, 그녀가 혼자 타지 않았다.
그날도 나는 맨 뒷자리에 있었다. 한쪽 귀에 이어폰을 꽂고, 늘 듣던 그 밴드의 노래를 흘려보내고 있었다. 버스가 그 숲에 닿았고, 문이 열렸고, 그녀가 올라왔다. 그런데 한 남자가 그녀와 함께였다. 둘은 자연스럽게 앞쪽에 나란히 앉았다. 그 남자의 옆얼굴이 보인 순간, 손잡이를 쥔 손에 나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아는 얼굴이었다. 사진으로, 영상으로 수없이 봤던 얼굴. 내가 그녀 옆에서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던 바로 그 사람. 그 밴드의 보컬이었다.
나는 그 노래를 듣는 사람이었고, 그 사람은 그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었다.
그녀가 그에게 무언가를 말하며 웃었다. 그 밴드 이야기를 할 때 환해지던 그 눈빛으로. 아니, 그보다 더 환한 얼굴로. 그제야 그녀의 그 쓸쓸한 웃음이 무슨 뜻이었는지 알 것 같았다. 나는 매일 그녀 옆에서,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을 칭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그걸 다 듣고만 있었다. 한마디도 바로잡지 않고.
그때도 내 한쪽 귀에서는 노래가 흐르고 있었다. 하필 그 사람의 목소리였다. 눈앞의 그는 피해 고개를 돌릴 수 있어도, 귓속을 채운 목소리에서는 달아날 데가 없었다. 나는 이어폰을 뽑았다. 그래도 그 노래는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그날 하루에, 좋아하던 두 가지가 한꺼번에 빛을 잃었다. 노래도, 그 노래를 함께 듣던 사람도. 하나가 무너지면서 다른 하나를 같이 데리고 갔다. 그를 좋아하게 된 것도 그녀 곁에서였다. 나를 그녀에게 데려다준 사람과, 그녀에게서 떼어놓은 사람이 같았다.
그녀는 끝내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평소 같으면 무심코 한 번쯤 뒤를 둘러보았을 텐데, 그날은 그러지 않았다. 앞에 앉은 사람 말고는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 듯했다.
그날 처음으로 나는, 내가 매일 봐온 그 시간이 나에게만 특별했다는 걸 알았다. 그녀에게는 그냥 버스를 타고 가는 시간이었을 것이다. 옆자리에 누가 앉든 크게 다르지 않은, 잠깐의 잡담. 그 한 뼘의 거리를 좁혀온 것도 나 혼자였다. 나는 그것도 모른 채, 그 한 뼘이 우리 둘의 것이라 여겼나보다.
나는 그날도 늘 그렇듯 먼저 내렸다. 회색 건물이 솟는 그 자리에서. 여느 날 같으면 그녀에게 이어폰 한 짝을 돌려주고 내렸을 텐데, 그날은 돌려줄 것이 없었다. 정류장에 서서, 나는 두 사람을 향해 속으로 많은 말을 쏟았다. 입 밖으로는 한 번도 내지 못할 말들을. 그렇게 좋아하던 것이 그 순간 가장 견디기 어려운 것이 되어 있었다. 약속한 적도 없는데 무언가를 빼앗긴 기분이, 명치 어디께에서 뜨겁게 차올랐다.
주머니에 손을 넣자 그 키링이 잡혔다. 두 동강 난 채로 거기 있었다. 우리를 시작하게 한 것, 그녀가 구해 오겠다던 것, 그 밴드의 것. 이제는 그 모든 게 다 같은 얼굴이었다. 나는 그것을 꺼내, 건물들 사이 어딘가로 힘껏 던졌다. 작은 쇳조각이 어디 떨어졌는지는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았다. 던지고 나니 잠깐, 후련했다.
사실 나는 그 밴드를 그렇게까지 좋아하지도 않았다. 그 키링도 친구를 따라간 어느 줄에서 우연히 받은 것이었다. 행운을 가져다줄까 싶어 가방에 매달고 다녔을 뿐이다. 그런 내가 그녀 옆에서는 그 보컬을 세상에서 제일 아끼는 사람처럼 떠들었다. 그녀와 한마디라도 더 나누고 싶어서. 행운을 빌던 그 부적은, 결국 가장 보고 싶지 않은 걸 보여준 자리에 버려졌다.
그런데 그 뜨거운 것을 그녀에게 겨눌 자격이, 나에게 있었던가. 그녀는 남자친구가 없다고 한 적도 없고, 나는 그런 걸 물어본 적조차 없었다. 그 남자가 정말 그녀의 연인인지도 모르면서, 나는 나란히 앉은 두 사람의 뒷모습 하나로 모든 걸 단정했다. 그 사람은 노래를 했을 뿐이고, 그녀는 그 노래를 좋아했을 뿐이다. 누구도 나에게 무엇을 약속한 적이 없었다. 겨눌 데를 찾지 못한 그 마음은, 결국 나에게로 돌아와 박혔다.
그 뒤로 나는 그 버스를 한동안 타지 않았다. 그녀를 피한다기보다, 그 앞자리의 두 사람을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 며칠 다른 시간의 버스를 탔고, 며칠은 아예 걸어서 다른 길로 돌아갔다. 그러는 사이 마음이 가라앉으면 다시 타면 되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다시 그 버스를 탔을 때, 그녀는 이미 거기 없었다. 버스가 그 숲에 닿아도 그녀는 올라타지 않았다. 그 사람과 시간을 맞추게 된 건지, 그냥 그렇게 된 건지 나는 모른다. 내가 잠깐 그 버스를 비운 사이, 그녀의 시간도 그 버스에서 비켜나 있었다. 우습게도, 내가 그녀를 피하려던 며칠 동안 정작 영영 비켜난 건 그녀 쪽이었다.
그래도 나는 다시 늘 타던 시각의 버스를 탔다. 어느새 다시 뒷자리에 앉아 옆자리를 비워두고 있었다. 거기 그녀가 오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그렇게 속으로 그 마음을 다 쏟아냈는데, 막상 그녀가 없으니 남는 건 미움이 아니라 빈자리였다. 채워져 있을 때는 보이지 않던 것이 비고 나서야 보였다. 버릇처럼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가, 거기 아무것도 없다는 걸 매번 새로 알았다. 던질 때는 후련했는데, 빈 주머니는 그 후련함보다 오래갔다. 그걸 떨어뜨렸던 날, 그걸 밟고 하얘지던 얼굴, 그걸 알아보고 환해지던 얼굴. 우리를 시작하게 한 그 쇳조각마저, 이제는 내 손으로 없애버린 뒤였다.
택시가 다리를 건넌다. 강물이 교각 사이로 토막 났다가, 다리를 다 건너자 다시 이어진다. 가려져 있었을 뿐, 물은 줄곧 거기 있었다.
그렇게 한참이 지난 어느 날이었다. 나는 평소처럼 그 버스를 타고 그 숲을 지나는 중이었다. 버스가 그 정류장에 닿아 속도를 줄였고, 나는 무심코 창밖을 보았다.
그녀가 거기 서 있었다.
흔들리는 빛 속에, 그녀가 버스를 기다리며 서 있었다. 내가 탄 것과는 다른 노선이었다. 멀지도 않았다. 내 버스가 정류장에 서느라 속도를 줄이는 동안, 유리 한 장을 사이에 두고 그녀가 거기 있었다. 표정까지 또렷했다. 무언가를 기다리는 사람의 얼굴. 시선은 내 버스가 아니라 그 너머, 자기가 탈 버스가 올 방향을 향해 있었다. 눈동자가 그쪽으로 한 번 움직였고, 그 눈길이 내 쪽을 스쳤지만 끝내 나에게 닿지는 않았다. 그녀는 유리 안의 나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못 본 게 아니라, 거기 내가 있으리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문이 닫히려 했다. 버스가 다시 출발하면 나는 그 숲을 또 그냥 지나칠 것이었다. 늘 그래왔듯이. 그런데 그 순간, 나는 정차 버튼을 눌렀다. 빨간 불이 들어왔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닫히려는 문 사이로 내렸다. 왜 그랬는지, 지금도 다 설명하지는 못하겠다. 그녀에게 가려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이렇게라도 하면, 유리 한 장 뒤에 내가 있었다는 걸 그녀가 한 번쯤 알아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단 한 번이라도, 그녀의 눈에 내가 비치기를. 그 바람으로 나는 그 숲에 내렸다.
그것이 내가 그 숲의 땅을 처음 밟은 순간이었다. 매일 지나기만 하던 그 정류장에, 처음으로 두 발을 디딘 것이다. 흔들리는 빛의 조각들이 내 발등 위에서도 자리를 옮겼다. 그녀가 매일 밟던 그 빛을, 그제야 나도 밟았다. 그런데 막상 내리고 나니, 나는 그녀를 향해 돌아서지 못했다. 알아봐 주기를 바라며 내렸으면서, 정작 눈이 마주칠까 봐 등을 돌리고 반대편으로 걸었다. 곧 그녀가 기다리던 버스가 와서 그녀를 태우고 떠나는 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다. 그녀와 가장 가까이 있었던 그 순간에, 나는 그녀에게 등을 돌리고 있었다. 그 내림을 나는 오래 후회했다.
그녀는 사라진 게 아니었다. 여전히 그 숲에서 버스를 탔다. 다만 이제 내가 탄 버스가 아닌 다른 버스를, 내가 지나간 뒤의 시각에 탔다. 한때 우리는 같은 버스 안에서 만났는데, 이제는 같은 자리를 매일 다른 순간에 스칠 뿐이었다.
차라리 사라졌다면 끝이었을 것이다. 끝난 것은 언젠가 잊을 수 있다. 그런데 그녀는 끝나지 않았다. 손이 닿을 만큼 가까운 곳에서 영영 닿지 않을 시간을 두고 매일 거기 있었다. 몰랐다면 며칠 빈자리를 보다 그만두었을 텐데, 알아버려서 그럴 수 없었다.
그날 이후 나는 그 어긋남을 좁혀보려 했다. 어떤 날은 한 대 앞의 버스를, 어떤 날은 한 대 뒤의 버스를 탔다. 버스가 그 숲에 닿을 때마다 창밖을 보았다. 그녀가 거기 서 있기를 바라면서. 그러나 그때마다 그 정류장에는 모르는 사람들만 서 있었다. 한 대 일찍 가면 그녀는 이미 떠난 뒤였고, 한 대 늦게 가면 아직 오지 않았다. 거리는 늘 그만큼이었다. 좁혀지지도 멀어지지도 않는 그 일정한 거리를 매일 더듬는 일은, 차라리 그녀가 아주 사라지는 것보다 사람을 천천히 망가뜨렸다.
택시가 강변도로를 빠져나온다. 신호에 걸려 멈추자 미터기가 한 칸 올라간다. 가만히 있어도 요금은 오른다. 기다림에는 값을 매기지 않지만, 기다리지 않는 데에는 값이 매겨진다. 나는 그 값을 치르는 데 익숙해진 사람이다.
언제부터였을까. 점점 그 버스를 타는 일이 줄었다. 창밖을 살피는 일도, 한 대 앞뒤로 옮겨 타며 그녀가 거기 있기를 바라는 일도, 어느새 뜸해졌다. 그만두기로 마음먹은 적은 없었다. 그저 어느 날 돌아보니 더는 그 노선에 오르지 않고 있었다.
버스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둘뿐이었다. 정류장에 서서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리는 것, 그리고 정차 버튼을 눌러 내리는 것.
그녀와 나는 같은 버스에 타고 있었다. 마음만 먹으면 종착역까지 함께 갈 수도 있었다. 그런데 나는 늘 내 목적지에서 먼저 버튼을 눌렀다. 회색 건물이 솟는 그 자리에서, 한 번도 빠짐없이. 그녀를 그렇게 좋아하면서도, 나는 한 번도 그녀를 기다린 적이 없었다. 기다림을 모르는 사람의 사랑은, 정해진 정류장마다 미리 내려버리는 버스 같은 것이었다. 가장 먼 곳에 닿기도 전에, 늘 중간에서 끝나는.
오늘 밤도 나는 그 환한 거리에 있었다. 그런데 그 빠른 것들 속에서 내가 줄곧 찾고 있던 건 결국 느린 무언가였다. 택시를 잡아타고 향한 곳이 하필 숲이었던 것처럼. 잊으려던 몸부림조차, 돌아보면 다시 그 사랑을 찾는 일이었다.
지금 나는 비싼 값을 치르고 택시를 탄다. 기다릴 사람이 없어서가 아니다. 다시 기다렸다가 또 어긋나는 게 두려워, 기다림이라는 것 자체를 돈을 주고 버린 것이다.
"다 왔습니다. 서울숲이요."
기사의 목소리에 나는 유리창에서 머리를 뗀다. 관자놀이에 남은 떨림이 천천히 가신다. 요금을 치르고 문을 열고 내린다. 등 뒤에서 택시가 멀어지는 소리가 들리고, 나는 도착한 자리에 혼자 선다. 이른 아침의 빛이 얼굴에 닿는다.
눈앞에 나무들이 서 있다. 키 큰 나무들이 가지를 겹쳐 머리 위에 천장을 드리웠다. 그 틈으로 빛이 떨어져 바닥에 흩어지고, 바람이 불 때마다 그 조각들이 한꺼번에 자리를 옮긴다. 그 옛 숲의 바닥이 그랬듯, 여기 바닥도 한순간도 가만히 있지 않는다. 빛과 그늘이 자리를 바꾸며 내 발등 위를 지나간다.
벗어나려고 돈까지 치렀는데, 실려 온 곳이 또 숲이었다.
생각해보면 나는 그 옛 숲에 꼭 한 번 내려봤다. 그녀 눈에 한 번이라도 비치고 싶어 내렸던 그날. 그 한 번을 빼면, 나는 늘 버스 안에서 그녀를 창 너머로 보기만 했다. 그 숲은 그녀의 자리였지 내 자리가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 나는 그 숲에 서 있다. 버스를 기다리는 쪽이 되어서.
나도 모르게 또 주머니에 손이 갔다. 손끝에 닿는 건 아무것도 없다. 그날 던져버린 뒤로 늘 이렇다. 그 밴드는 아직 어딘가에서 노래하고 있겠지만, 나는 더 이상 그 노래를 듣지 않는다. 빈 주머니 안에서 그녀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 작은 걸 구해 오겠다던 말도. 그때 그녀는 정말 구해다 줄 생각이었을까, 아니면 그냥 미안하다는 말을 그렇게 했을 뿐일까. 그것조차 나는 끝내 모른다. 이제는 그걸 물어볼 쇳조각 하나 내게 남아 있지 않다.
나는 정류장 쪽으로 걸음을 옮긴다. 그러다 멈춘다. 어느 버스를 기다려야 할지 모르겠다. 애초에 어디로 가려고 내린 것도 아니었다. 노선도에는 처음 보는 이름들이 줄지어 있다. 어느 것도 내가 갈 곳 같지 않다. 정류장을 지나쳐 숲 안쪽으로 몇 걸음 들어갔다가, 다시 돌아온다. 어느 방향으로도 정해지지 않는다.
저편에서 버스 한 대가 정류장에 와서 선다. 문이 열린다. 누군가 타고 누군가 내린다. 문이 닫힌다. 버스가 떠난다. 나는 타지 않는다. 그것이 내가 기다리던 버스인지조차 모르니까.
벗어났다고 믿었는데, 나는 그 숲을 한 번도 떠난 적이 없었다.
아무것도 쥐지 않은 손으로, 나는 흔들리는 빛 위에 서 있다. 발밑에서 빛과 그늘이 자리를 바꾸고, 또 바꾼다. 어느 것도 오래 머물지 않는 그 위에서, 나는 다음 버스를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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