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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으로숲으로

숲으로

벽의 상수역 앞에서는 무엇이든 쉽게 다가온다⁠. 부르지 않아도⁠, 손을 들지 않아도⁠, 서 있다는 것만으로 무언가 곁에 와 선다⁠. 그것이 빈 택시라는 걸 아는 데에는 잠깐이면 된다⁠. 도시의 다른 곳에서는 한참을 기다려야 겨우 한 대가 오는데⁠, 이 거리만은 그렇지 않다⁠. 여기서는 기다림이 없다⁠.

거리는 환하다⁠. 새벽인데도 환하다⁠. 지하에서 저음이 올라온다⁠. 발바닥으로 먼저 느껴지고 그다음 귀에 닿는다⁠. 문이 열리면 안에 있던 소리가 통째로 쏟아진다⁠. 사람들이 그 문에서 나온다⁠. 옷매무새가 풀린 채로⁠. 신을 손에 들고⁠. 누군가에게 기댄 채로⁠. 화장이 번지고 넥타이가 늘어진 얼굴들이 도로변에 선다⁠.

택시가 와서 선다⁠. 문이 닫힌다⁠. 그 순간 저음이 끊긴다⁠. 방금까지 몸을 흔들던 소리가 한순간 사라지고⁠, 사람들은 그제야 멈춘다⁠. 자기가 어디에 있었는지 그제야 안다는 얼굴로⁠. 들어갈 때는 줄을 서야 했던 곳에서⁠, 나올 때는 손도 들지 않고 실려 나간다⁠. 그렇게 빨리 들어가 빨리 나오는 동안 무언가를 쥐었다가⁠, 문이 닫히는 순간 그게 손에 남아 있지 않다는 걸 안다⁠.

나도 그 사람들 틈에서 차에 오른다⁠. 미지근한 공기가 얼굴을 덮는다⁠. 안과 밖은 온도가 다르고 소리가 다르다⁠. 그 사이를 넘을 때 몸이 한 번 움찔한다⁠. 기사가 백미러로 나를 본다⁠.

"어디로 모실까요⁠."

"서울숲이요⁠."

기사는 짧게 고개를 끄덕이고 차를 출발시킨다⁠. 미터기가 붉은 숫자를 켜고⁠, 그 숫자가 한 칸 올라가는 작은 소리가 들린다⁠. 차가 강변 쪽으로 머리를 돌리는 동안 나는 유리창에 머리를 기댄다⁠. 창이 잘게 떨리고⁠, 그 떨림이 관자놀이를 타고 들어온다⁠. 눈은 감지 않는다⁠. 감으면 오히려 더 환해진다⁠. 그래서 뜬 눈으로 흐르는 바깥을 보면서⁠, 그 위로 다른 풍경이 천천히 겹쳐 오는 걸 가만히 둔다⁠. 그 정류장이 떠오른다⁠.

거기엔 나무가 많았다⁠.

키 큰 나무들이 가지를 뻗어 머리 위에서 서로 겹쳤고⁠, 그 겹친 가지가 정류장 위에 천장을 만들었다⁠. 누가 세운 게 아니라 자라난 천장이라 빈틈이 많았고⁠, 그 틈으로 햇빛이 떨어졌다⁠. 잎과 잎 사이에서 부서진 빛이 보도블록 위에 작은 조각으로 흩어졌다⁠. 바람이 불어 잎이 뒤집히면 그 조각들이 한꺼번에 자리를 옮겼다⁠. 그래서 그곳의 바닥은 가만히 있는 법이 없었다⁠. 빛과 그늘이 끊임없이 자리를 바꾸며 사람들의 발등 위를 지나갔다⁠. 푸르고 어지러운 곳이었다⁠.

나는 그 숲에서 버스를 타지 않았다⁠. 내가 오르는 곳은 그보다 몇 정거장 앞⁠, 나무 한 그루 없는 평범한 정류장이었다⁠. 버스가 출발해 한참을 달리다 그 푸른 정류장에 닿으면⁠, 문이 열리고 그녀가 흔들리는 빛을 밟으며 올라왔다⁠. 그 장면을 나는 늘 창 너머로 먼저 보았다⁠. 그녀에게 그 숲은 매일 버스를 타는 자리였고⁠, 나에게 그 숲은 매일 그녀가 나타나는 자리였다⁠.

그 시각은 아침이라기엔 늦고 한낮이라기엔 일렀다⁠. 도시의 첫 분주함이 한 차례 지나간 어중간한 때⁠. 같은 시각⁠, 같은 버스⁠. 그 반복이 너무 당연해서 나는 그것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처음에 그녀는 그저 풍경이었다⁠. 매일 같은 정류장에서 올라오는 사람⁠. 누구인지 몰랐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같은 풍경 속에 같은 사람이 매일 놓여 있으면⁠, 알려고 하지 않아도 알게 되는 게 생긴다⁠. 그녀는 거의 창가에 앉았다⁠. 가방을 무릎에 올려두었다⁠. 버스가 흔들릴 때 손잡이 대신 앞좌석 등받이를 짚었다⁠. 창밖을 볼 때 고개를 다 돌리지 않고 눈만 옆으로 두었다⁠. 이런 걸 아는 데에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게 그녀를 안다는 뜻은 아니었다⁠. 나는 그녀의 이름을 몰랐고⁠,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몰랐고⁠, 무엇을 하며 사는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몰랐다⁠. 한 사람에 대해 이렇게 많은 걸 알면서 이렇게 아무것도 모를 수 있다는 게⁠, 그때는 이상하지도 않았다⁠.

우리가 처음 말을 섞은 건 한 물건 때문이었다⁠. 그날 버스가 유난히 붐벼 나는 앉지 못하고 손잡이를 잡고 서 있었다⁠. 과속방지턱을 크게 넘으면서 몸이 휘청했고⁠, 그 바람에 가방 옆주머니에 걸어둔 키링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떨어지는 줄도 몰랐다⁠. 마침 앞에 앉아 있던 그녀가 그걸 보고 주우려 몸을 숙였는데⁠, 그 순간 버스가 다시 흔들렸고⁠, 그녀의 발이 먼저 그 위를 디뎠다⁠. 둔탁하게 눌리는 감각이 발바닥에 닿았는지 그녀가 흠칫 발을 들었다⁠. 키링은 두 동강이 나 있었다⁠.

그녀의 얼굴이 하얘졌다⁠. 죄송해요⁠, 하고 그것을 집어 들었다⁠. 괜찮다고⁠, 별것 아니라고 나는 말했다⁠. 별것 아닌 척을 했다⁠. 그런데 그녀가 부서진 키링을 손바닥에 올려놓고 들여다보더니 표정이 달라졌다⁠. 이거⁠, 하고 말끝을 흐렸다⁠. 그녀는 그게 무엇인지 알아본 것이다⁠. 어느 밴드의 굿즈였다⁠. 한참 전에 아주 적은 수량만 만들어져 이제는 중고로도 거의 나오지 않는 것⁠. 모르는 사람에게는 그냥 쇳조각이지만⁠, 아는 사람에게는 돈을 줘도 구하기 어려운 물건이라는 걸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녀도 그 밴드를 좋아했던 것이다⁠. 그 사실을 확인한 순간⁠, 그녀의 목소리가 빨라지고 눈빛이 환해졌다⁠. 미안하다던 얼굴은 어느새 사라지고⁠, 그 밴드 이야기를 하는 다른 얼굴이 그 자리에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변상을 하겠다고 했다⁠. 같은 걸 구해 오겠다고⁠. 나는 그게 불가능하다는 걸 알았고⁠, 그녀도 알았다⁠. 구할 수 없는 걸 구해 오겠다는 말과 구할 수 없으니 괜찮다는 말이 우리 사이를 몇 번 오갔다⁠.

버스에서 사람들이 하나둘 내려 자리가 비기 시작했다⁠. 나도 손잡이를 놓고 어딘가 앉을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러자 그녀가 조용히 옆자리를 가리켰다⁠. 거기 앉으라는 뜻이었다⁠. 나는 그 옆에 앉았다⁠. 그렇게 우리는 남은 길을 나란히 갔다⁠. 결국 변상은 받지 않았다⁠. 받을 방법이 없기도 했고⁠, 받고 싶지도 않았다⁠. 부서진 키링은 두 동강 난 채로 내 주머니에 남았다⁠. 버릴 이유가 없어서 그냥 두었다⁠.

택시 안 라디오에서 어떤 노래가 흘러나온다⁠. 한참 유행하는⁠, 어디서나 들리는 곡이다⁠. 나도 모르게 미간이 좁혀졌던 모양이다⁠. 백미러로 나를 한 번 본 기사가 말없이 라디오를 끈다⁠. 언제부턴가 노래를 듣는 일이 불편해졌다⁠. 차 안이 조용해지고⁠, 그 조용함 속으로 다시 그날들이 들어온다⁠.

우리가 다시 나란히 앉게 된 건 며칠 뒤였다⁠. 그날 그녀가 먼저 나를 알아보고는⁠, 이어폰 한 짝을 내 쪽으로 내밀었다⁠. 그 밴드 신곡이 나왔다면서⁠. 라디오에서는 좀처럼 틀어주지 않는⁠, 아는 사람만 아는 밴드였다⁠. 그 노래를 누구한테 들려주고 싶었는데 마침 잘됐다는 얼굴이었다⁠. 나는 그 한 짝을 받아 귀에 꽂았다⁠. 그렇게 우리는 맨 뒷자리에 나란히 앉았다⁠. 기사의 백미러가 닿지 않는 자리⁠. 거기 앉으면 버스 전체가 보이는데 정작 우리는 누구의 눈에도 잘 띄지 않았다⁠.

그날 이후 우리는 종종 그 자리에 함께 앉았다⁠. 한 사람의 귀에 한 짝씩⁠, 같은 노래가 흘렀다⁠. 선이 짧아 둘 사이의 거리가 한 뼘으로 고정되었다⁠. 과속방지턱을 넘을 때마다 어깨가 부딪혔고⁠, 커브를 돌면 둘 다 같은 쪽으로 쏠렸다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 한 뼘 안에서 우리는 어느 앨범이 더 좋은지⁠, 어느 곡의 어느 부분이 좋은지 이야기했다⁠. 의견이 갈리면 그녀는 즐거워했다⁠. 가장 좋아한다는 곡이 나올 때는 오히려 말이 없어졌다⁠.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지금은 거의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한쪽 귀로 노래가 흐르고 다른 쪽 귀로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던⁠, 그 두 소리가 섞이던 감각은 남아 있다⁠.

우리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버스를 타고 가는 동안 잠깐 나란히 앉는 사이⁠. 연락처를 주고받지도 않았고 버스 밖에서 따로 만나지도 않았다⁠. 다만 아침에 눈을 뜨면 그 버스 시간이 먼저 떠올랐고⁠, 별다를 것 없는 하루에서 꽤 견딜 만한건 그 구간이었다⁠. 늘 내가 먼저 내렸다⁠. 빈 들판이 끝나고 회색 건물이 솟기 시작하는 자리에서⁠, 이어폰 한 짝을 그녀에게 돌려주고 내렸다⁠. 남은 노래는 그녀가 혼자 들었을 것이다⁠. 그녀가 어디까지 가는지는 끝내 보지 못했다⁠.

그 밴드를⁠, 그중에서도 보컬을 나는 가장 좋아하게 됐다⁠. 솔직히 처음부터 좋아했던 건 아니다⁠. 그녀를 만나기 전까지 나는 그 밴드를 잘 알지도 못했다⁠. 그런데 그녀 옆에서 그 목소리를 매일 듣다 보니⁠, 어느새 그 사람이 제일 좋아졌다⁠. 음악은 내가 그녀와 나눌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것이었고⁠, 그 한가운데 그 사람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녀 옆에서 종종 그 사람 이야기를 했다⁠. 목소리가 어떻고⁠, 어느 무대에서 어땠고⁠, 가사를 쓰는 방식이 어떻게 남다른지⁠. 좋아하는 걸 좋아한다고 말할 때 사람은 좀 우쭐해지기 마련이라⁠, 나는 그 사람을 칭찬하면서 은근히 내 안목까지 자랑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럴 때 그녀는 가만히 들었다⁠. 맞장구를 치지도⁠, 반박을 하지도 않고⁠, 그저 창밖으로 눈을 두고 옅게 웃었다⁠. 가끔은 그 웃음이 조금 쓸쓸해 보이기도 했다⁠. 그 쓸쓸함이 무언가를 말하고 있다는 건 나도 어렴풋이 느꼈다⁠. 다만 그게 무슨 뜻인지 캐묻지 않았다⁠. 내 말에 동의하는 거라고⁠, 아니면 별 관심이 없는 거라고 여기는 편이 나에겐 편했다⁠. 그 웃음의 진짜 의미를 나는 한참 뒤에야 알았다⁠.

그 무렵의 그녀는 어딘가 달라져 있었다⁠. 가라앉은 얼굴 위로 내가 모르는 다른 빛이 비치는 것 같았다⁠.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어볼 수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묻지 않았다⁠. 우리는 그렇게까지 가까운 사이가 아니었고⁠, 무엇보다 물어서 알게 될 답이 두려웠다⁠.

그러다 어느 날⁠, 그녀가 혼자 타지 않았다⁠.

그날도 나는 맨 뒷자리에 있었다⁠. 한쪽 귀에 이어폰을 꽂고⁠, 늘 듣던 그 밴드의 노래를 흘려보내고 있었다⁠. 버스가 그 숲에 닿았고⁠, 문이 열렸고⁠, 그녀가 올라왔다⁠. 그런데 한 남자가 그녀와 함께였다⁠. 둘은 자연스럽게 앞쪽에 나란히 앉았다⁠. 그 남자의 옆얼굴이 보인 순간⁠, 손잡이를 쥔 손에 나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아는 얼굴이었다⁠. 사진으로⁠, 영상으로 수없이 봤던 얼굴⁠. 내가 그녀 옆에서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던 바로 그 사람⁠. 그 밴드의 보컬이었다⁠.

나는 그 노래를 듣는 사람이었고⁠, 그 사람은 그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었다⁠.

그녀가 그에게 무언가를 말하며 웃었다⁠. 그 밴드 이야기를 할 때 환해지던 그 눈빛으로⁠. 아니⁠, 그보다 더 환한 얼굴로⁠. 그제야 그녀의 그 쓸쓸한 웃음이 무슨 뜻이었는지 알 것 같았다⁠. 나는 매일 그녀 옆에서⁠,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을 칭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그걸 다 듣고만 있었다⁠. 한마디도 바로잡지 않고⁠.

그때도 내 한쪽 귀에서는 노래가 흐르고 있었다⁠. 하필 그 사람의 목소리였다⁠. 눈앞의 그는 피해 고개를 돌릴 수 있어도⁠, 귓속을 채운 목소리에서는 달아날 데가 없었다⁠. 나는 이어폰을 뽑았다⁠. 그래도 그 노래는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그날 하루에⁠, 좋아하던 두 가지가 한꺼번에 빛을 잃었다⁠. 노래도⁠, 그 노래를 함께 듣던 사람도⁠. 하나가 무너지면서 다른 하나를 같이 데리고 갔다⁠. 그를 좋아하게 된 것도 그녀 곁에서였다⁠. 나를 그녀에게 데려다준 사람과⁠, 그녀에게서 떼어놓은 사람이 같았다⁠.

그녀는 끝내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평소 같으면 무심코 한 번쯤 뒤를 둘러보았을 텐데⁠, 그날은 그러지 않았다⁠. 앞에 앉은 사람 말고는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 듯했다⁠.

그날 처음으로 나는⁠, 내가 매일 봐온 그 시간이 나에게만 특별했다는 걸 알았다⁠. 그녀에게는 그냥 버스를 타고 가는 시간이었을 것이다⁠. 옆자리에 누가 앉든 크게 다르지 않은⁠, 잠깐의 잡담⁠. 그 한 뼘의 거리를 좁혀온 것도 나 혼자였다⁠. 나는 그것도 모른 채⁠, 그 한 뼘이 우리 둘의 것이라 여겼나보다⁠.

나는 그날도 늘 그렇듯 먼저 내렸다⁠. 회색 건물이 솟는 그 자리에서⁠. 여느 날 같으면 그녀에게 이어폰 한 짝을 돌려주고 내렸을 텐데⁠, 그날은 돌려줄 것이 없었다⁠. 정류장에 서서⁠, 나는 두 사람을 향해 속으로 많은 말을 쏟았다⁠. 입 밖으로는 한 번도 내지 못할 말들을⁠. 그렇게 좋아하던 것이 그 순간 가장 견디기 어려운 것이 되어 있었다⁠. 약속한 적도 없는데 무언가를 빼앗긴 기분이⁠, 명치 어디께에서 뜨겁게 차올랐다⁠.

주머니에 손을 넣자 그 키링이 잡혔다⁠. 두 동강 난 채로 거기 있었다⁠. 우리를 시작하게 한 것⁠, 그녀가 구해 오겠다던 것⁠, 그 밴드의 것⁠. 이제는 그 모든 게 다 같은 얼굴이었다⁠. 나는 그것을 꺼내⁠, 건물들 사이 어딘가로 힘껏 던졌다⁠. 작은 쇳조각이 어디 떨어졌는지는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았다⁠. 던지고 나니 잠깐⁠, 후련했다⁠.

사실 나는 그 밴드를 그렇게까지 좋아하지도 않았다⁠. 그 키링도 친구를 따라간 어느 줄에서 우연히 받은 것이었다⁠. 행운을 가져다줄까 싶어 가방에 매달고 다녔을 뿐이다⁠. 그런 내가 그녀 옆에서는 그 보컬을 세상에서 제일 아끼는 사람처럼 떠들었다⁠. 그녀와 한마디라도 더 나누고 싶어서⁠. 행운을 빌던 그 부적은⁠, 결국 가장 보고 싶지 않은 걸 보여준 자리에 버려졌다⁠.

그런데 그 뜨거운 것을 그녀에게 겨눌 자격이⁠, 나에게 있었던가⁠. 그녀는 남자친구가 없다고 한 적도 없고⁠, 나는 그런 걸 물어본 적조차 없었다⁠. 그 남자가 정말 그녀의 연인인지도 모르면서⁠, 나는 나란히 앉은 두 사람의 뒷모습 하나로 모든 걸 단정했다⁠. 그 사람은 노래를 했을 뿐이고⁠, 그녀는 그 노래를 좋아했을 뿐이다⁠. 누구도 나에게 무엇을 약속한 적이 없었다⁠. 겨눌 데를 찾지 못한 그 마음은⁠, 결국 나에게로 돌아와 박혔다⁠.

그 뒤로 나는 그 버스를 한동안 타지 않았다⁠. 그녀를 피한다기보다⁠, 그 앞자리의 두 사람을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 며칠 다른 시간의 버스를 탔고⁠, 며칠은 아예 걸어서 다른 길로 돌아갔다⁠. 그러는 사이 마음이 가라앉으면 다시 타면 되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다시 그 버스를 탔을 때⁠, 그녀는 이미 거기 없었다⁠. 버스가 그 숲에 닿아도 그녀는 올라타지 않았다⁠. 그 사람과 시간을 맞추게 된 건지⁠, 그냥 그렇게 된 건지 나는 모른다⁠. 내가 잠깐 그 버스를 비운 사이⁠, 그녀의 시간도 그 버스에서 비켜나 있었다⁠. 우습게도⁠, 내가 그녀를 피하려던 며칠 동안 정작 영영 비켜난 건 그녀 쪽이었다⁠.

그래도 나는 다시 늘 타던 시각의 버스를 탔다⁠. 어느새 다시 뒷자리에 앉아 옆자리를 비워두고 있었다⁠. 거기 그녀가 오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그렇게 속으로 그 마음을 다 쏟아냈는데⁠, 막상 그녀가 없으니 남는 건 미움이 아니라 빈자리였다⁠. 채워져 있을 때는 보이지 않던 것이 비고 나서야 보였다⁠. 버릇처럼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가⁠, 거기 아무것도 없다는 걸 매번 새로 알았다⁠. 던질 때는 후련했는데⁠, 빈 주머니는 그 후련함보다 오래갔다⁠. 그걸 떨어뜨렸던 날⁠, 그걸 밟고 하얘지던 얼굴⁠, 그걸 알아보고 환해지던 얼굴⁠. 우리를 시작하게 한 그 쇳조각마저⁠, 이제는 내 손으로 없애버린 뒤였다⁠.

택시가 다리를 건넌다⁠. 강물이 교각 사이로 토막 났다가⁠, 다리를 다 건너자 다시 이어진다⁠. 가려져 있었을 뿐⁠, 물은 줄곧 거기 있었다⁠.

그렇게 한참이 지난 어느 날이었다⁠. 나는 평소처럼 그 버스를 타고 그 숲을 지나는 중이었다⁠. 버스가 그 정류장에 닿아 속도를 줄였고⁠, 나는 무심코 창밖을 보았다⁠.

그녀가 거기 서 있었다⁠.

흔들리는 빛 속에⁠, 그녀가 버스를 기다리며 서 있었다⁠. 내가 탄 것과는 다른 노선이었다⁠. 멀지도 않았다⁠. 내 버스가 정류장에 서느라 속도를 줄이는 동안⁠, 유리 한 장을 사이에 두고 그녀가 거기 있었다⁠. 표정까지 또렷했다⁠. 무언가를 기다리는 사람의 얼굴⁠. 시선은 내 버스가 아니라 그 너머⁠, 자기가 탈 버스가 올 방향을 향해 있었다⁠. 눈동자가 그쪽으로 한 번 움직였고⁠, 그 눈길이 내 쪽을 스쳤지만 끝내 나에게 닿지는 않았다⁠. 그녀는 유리 안의 나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못 본 게 아니라⁠, 거기 내가 있으리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문이 닫히려 했다⁠. 버스가 다시 출발하면 나는 그 숲을 또 그냥 지나칠 것이었다⁠. 늘 그래왔듯이⁠. 그런데 그 순간⁠, 나는 정차 버튼을 눌렀다⁠. 빨간 불이 들어왔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닫히려는 문 사이로 내렸다⁠. 왜 그랬는지⁠, 지금도 다 설명하지는 못하겠다⁠. 그녀에게 가려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이렇게라도 하면⁠, 유리 한 장 뒤에 내가 있었다는 걸 그녀가 한 번쯤 알아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단 한 번이라도⁠, 그녀의 눈에 내가 비치기를⁠. 그 바람으로 나는 그 숲에 내렸다⁠.

그것이 내가 그 숲의 땅을 처음 밟은 순간이었다⁠. 매일 지나기만 하던 그 정류장에⁠, 처음으로 두 발을 디딘 것이다⁠. 흔들리는 빛의 조각들이 내 발등 위에서도 자리를 옮겼다⁠. 그녀가 매일 밟던 그 빛을⁠, 그제야 나도 밟았다⁠. 그런데 막상 내리고 나니⁠, 나는 그녀를 향해 돌아서지 못했다⁠. 알아봐 주기를 바라며 내렸으면서⁠, 정작 눈이 마주칠까 봐 등을 돌리고 반대편으로 걸었다⁠. 곧 그녀가 기다리던 버스가 와서 그녀를 태우고 떠나는 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다⁠. 그녀와 가장 가까이 있었던 그 순간에⁠, 나는 그녀에게 등을 돌리고 있었다⁠. 그 내림을 나는 오래 후회했다⁠.

그녀는 사라진 게 아니었다⁠. 여전히 그 숲에서 버스를 탔다⁠. 다만 이제 내가 탄 버스가 아닌 다른 버스를⁠, 내가 지나간 뒤의 시각에 탔다⁠. 한때 우리는 같은 버스 안에서 만났는데⁠, 이제는 같은 자리를 매일 다른 순간에 스칠 뿐이었다⁠.

차라리 사라졌다면 끝이었을 것이다⁠. 끝난 것은 언젠가 잊을 수 있다⁠. 그런데 그녀는 끝나지 않았다⁠. 손이 닿을 만큼 가까운 곳에서 영영 닿지 않을 시간을 두고 매일 거기 있었다⁠. 몰랐다면 며칠 빈자리를 보다 그만두었을 텐데⁠, 알아버려서 그럴 수 없었다⁠.

그날 이후 나는 그 어긋남을 좁혀보려 했다⁠. 어떤 날은 한 대 앞의 버스를⁠, 어떤 날은 한 대 뒤의 버스를 탔다⁠. 버스가 그 숲에 닿을 때마다 창밖을 보았다⁠. 그녀가 거기 서 있기를 바라면서⁠. 그러나 그때마다 그 정류장에는 모르는 사람들만 서 있었다⁠. 한 대 일찍 가면 그녀는 이미 떠난 뒤였고⁠, 한 대 늦게 가면 아직 오지 않았다⁠. 거리는 늘 그만큼이었다⁠. 좁혀지지도 멀어지지도 않는 그 일정한 거리를 매일 더듬는 일은⁠, 차라리 그녀가 아주 사라지는 것보다 사람을 천천히 망가뜨렸다⁠.

택시가 강변도로를 빠져나온다⁠. 신호에 걸려 멈추자 미터기가 한 칸 올라간다⁠. 가만히 있어도 요금은 오른다⁠. 기다림에는 값을 매기지 않지만⁠, 기다리지 않는 데에는 값이 매겨진다⁠. 나는 그 값을 치르는 데 익숙해진 사람이다⁠.

언제부터였을까⁠. 점점 그 버스를 타는 일이 줄었다⁠. 창밖을 살피는 일도⁠, 한 대 앞뒤로 옮겨 타며 그녀가 거기 있기를 바라는 일도⁠, 어느새 뜸해졌다⁠. 그만두기로 마음먹은 적은 없었다⁠. 그저 어느 날 돌아보니 더는 그 노선에 오르지 않고 있었다⁠.

버스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둘뿐이었다⁠. 정류장에 서서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리는 것⁠, 그리고 정차 버튼을 눌러 내리는 것⁠.

그녀와 나는 같은 버스에 타고 있었다⁠. 마음만 먹으면 종착역까지 함께 갈 수도 있었다⁠. 그런데 나는 늘 내 목적지에서 먼저 버튼을 눌렀다⁠. 회색 건물이 솟는 그 자리에서⁠, 한 번도 빠짐없이⁠. 그녀를 그렇게 좋아하면서도⁠, 나는 한 번도 그녀를 기다린 적이 없었다⁠. 기다림을 모르는 사람의 사랑은⁠, 정해진 정류장마다 미리 내려버리는 버스 같은 것이었다⁠. 가장 먼 곳에 닿기도 전에⁠, 늘 중간에서 끝나는⁠.

오늘 밤도 나는 그 환한 거리에 있었다⁠. 그런데 그 빠른 것들 속에서 내가 줄곧 찾고 있던 건 결국 느린 무언가였다⁠. 택시를 잡아타고 향한 곳이 하필 숲이었던 것처럼⁠. 잊으려던 몸부림조차⁠, 돌아보면 다시 그 사랑을 찾는 일이었다⁠.

지금 나는 비싼 값을 치르고 택시를 탄다⁠. 기다릴 사람이 없어서가 아니다⁠. 다시 기다렸다가 또 어긋나는 게 두려워⁠, 기다림이라는 것 자체를 돈을 주고 버린 것이다⁠.

"다 왔습니다⁠. 서울숲이요⁠."

기사의 목소리에 나는 유리창에서 머리를 뗀다⁠. 관자놀이에 남은 떨림이 천천히 가신다⁠. 요금을 치르고 문을 열고 내린다⁠. 등 뒤에서 택시가 멀어지는 소리가 들리고⁠, 나는 도착한 자리에 혼자 선다⁠. 이른 아침의 빛이 얼굴에 닿는다⁠.

눈앞에 나무들이 서 있다⁠. 키 큰 나무들이 가지를 겹쳐 머리 위에 천장을 드리웠다⁠. 그 틈으로 빛이 떨어져 바닥에 흩어지고⁠, 바람이 불 때마다 그 조각들이 한꺼번에 자리를 옮긴다⁠. 그 옛 숲의 바닥이 그랬듯⁠, 여기 바닥도 한순간도 가만히 있지 않는다⁠. 빛과 그늘이 자리를 바꾸며 내 발등 위를 지나간다⁠.

벗어나려고 돈까지 치렀는데⁠, 실려 온 곳이 또 숲이었다⁠.

생각해보면 나는 그 옛 숲에 꼭 한 번 내려봤다⁠. 그녀 눈에 한 번이라도 비치고 싶어 내렸던 그날⁠. 그 한 번을 빼면⁠, 나는 늘 버스 안에서 그녀를 창 너머로 보기만 했다⁠. 그 숲은 그녀의 자리였지 내 자리가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 나는 그 숲에 서 있다⁠. 버스를 기다리는 쪽이 되어서⁠.

나도 모르게 또 주머니에 손이 갔다⁠. 손끝에 닿는 건 아무것도 없다⁠. 그날 던져버린 뒤로 늘 이렇다⁠. 그 밴드는 아직 어딘가에서 노래하고 있겠지만⁠, 나는 더 이상 그 노래를 듣지 않는다⁠. 빈 주머니 안에서 그녀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 작은 걸 구해 오겠다던 말도⁠. 그때 그녀는 정말 구해다 줄 생각이었을까⁠, 아니면 그냥 미안하다는 말을 그렇게 했을 뿐일까⁠. 그것조차 나는 끝내 모른다⁠. 이제는 그걸 물어볼 쇳조각 하나 내게 남아 있지 않다⁠.

나는 정류장 쪽으로 걸음을 옮긴다⁠. 그러다 멈춘다⁠. 어느 버스를 기다려야 할지 모르겠다⁠. 애초에 어디로 가려고 내린 것도 아니었다⁠. 노선도에는 처음 보는 이름들이 줄지어 있다⁠. 어느 것도 내가 갈 곳 같지 않다⁠. 정류장을 지나쳐 숲 안쪽으로 몇 걸음 들어갔다가⁠, 다시 돌아온다⁠. 어느 방향으로도 정해지지 않는다⁠.

저편에서 버스 한 대가 정류장에 와서 선다⁠. 문이 열린다⁠. 누군가 타고 누군가 내린다⁠. 문이 닫힌다⁠. 버스가 떠난다⁠. 나는 타지 않는다⁠. 그것이 내가 기다리던 버스인지조차 모르니까⁠.

벗어났다고 믿었는데⁠, 나는 그 숲을 한 번도 떠난 적이 없었다⁠.

아무것도 쥐지 않은 손으로⁠, 나는 흔들리는 빛 위에 서 있다⁠. 발밑에서 빛과 그늘이 자리를 바꾸고⁠, 또 바꾼다⁠. 어느 것도 오래 머물지 않는 그 위에서⁠, 나는 다음 버스를 기다린다⁠.

댓글 · 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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